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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1세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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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누엘 1세는 1495년부터 1521년까지 포르투갈을 통치한 왕이다. 그는 두아르테 1세의 손자로, 주앙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마누엘 1세는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고, 아시아와의 해상 무역로 개척을 적극 지원하여 포르투갈의 번영을 이끌었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 등을 지원했으며, 인도양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건축 양식인 마누엘 양식을 발전시키고, 유대인 정책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는 세 번 결혼했으며, 여러 자녀를 두었다. 1521년 리스본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주앙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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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1세 (포르투갈)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마누엘 1세
콜린 데 코터, 1515년–1517년경
칭호포르투갈 국왕
재위 기간1495년 10월 25일 ~ 1521년 12월 13일
대관식1495년 10월 27일
이전 군주주앙 2세
다음 군주주앙 3세
출생일1469년 5월 31일
출생지알코셰트, 포르투갈
사망일1521년 12월 13일
사망지리스본, 포르투갈
매장지제로니무스 수도원
배우자이사벨 데 아라곤 (1497년 결혼, 1498년 사망)
마리아 데 아라곤 (1500년 결혼, 1517년 사망)
엘레오노르 데 아우스트리아 (1518년 결혼)
자녀미겔 다 파스, 포르투갈 왕세자
주앙 3세
이사벨, 신성 로마 황후
베아트리스, 사보이 공작 부인
루이스, 베자 공작
페르난두, 과르다 공작
추기경 인판테 아폰수
엔히크
두아르테, 기마랑이스 공작
마리아, 비제우 공작 부인
왕가아비스 가문
아버지페르난두, 비제우 공작
어머니베아트리스 데 포르투갈
종교로마 가톨릭교
마누엘 1세 서명
마누엘 1세 서명
이름
포르투갈어Manuel I
별칭"운이 좋은 자" (O Venturoso)
"축복받은 자" (O Bem-Aventurado)
"행복한 자" (O Afortunado)

2. 어린 시절

마누엘 1세 왕위 계보


기도하는 마누엘 1세의 모습, 그의 채색된 그라두알에 묘사됨, 1500년경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마누엘은 1469년 5월 31일 리스본 근교의 알코체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비제우 공작 페르난두(1433년~1470년)이고 어머니는 베아트리스(1430년~1506년)였다. 그는 페르난두와 베아트리스 사이의 아홉 자녀(아들 여섯, 딸 셋) 중 막내였다.

아버지 페르난두 공작은 두아르테 1세 국왕의 셋째 아들이자 아폰수 5세 국왕의 동생이었다. 또한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항해왕자 엔히크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매우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이었다. 어머니 베아트리스는 주앙 1세 국왕의 손녀였으며, 그녀의 언니 이사벨은 카스티야후안 2세 국왕과 결혼하여 이사벨 1세 여왕을 낳았다. 따라서 마누엘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여왕과 사촌 관계였다.

마누엘에게는 5명의 형과 3명의 누이가 있었다. 누나 중 한 명인 레오노르는 1473년 당시 왕세자였던 사촌 주앙 2세와 결혼하여 1481년 주앙 2세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이로 인해 마누엘은 국왕의 사촌이자 처남이 되었다.

마누엘은 여섯 아들 중 막내였고, 4명의 형은 어려서 사망했다. 유일하게 남은 형 디오고는 1484년 주앙 2세 국왕에 대한 반역 혐의로 국왕에게 직접 살해당했다.[15]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형들의 죽음으로 인해 왕위 계승 가능성이 생겨났다.

2. 1. 주앙 2세와의 갈등

마누엘은 포르투갈 귀족 가문과 주앙 2세 국왕 간의 갈등 속에서 성장했다. 주앙 2세는 귀족과 자치 공동체의 특권을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는 귀족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1483년, 포르투갈에서 가장 강력한 봉건 가문의 지도자였던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마누엘의 가족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누엘의 형이자 비제우 공작이었던 디오고는 반대파 귀족의 맹주로서 국왕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결국 디오고는 1484년 주앙 2세에게 직접 살해당했다. 형의 죽음 이후, 반역 세력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추대될 가능성이 커진 마누엘은 국왕에게 위험 인물로 간주되어 매우 불안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1491년 주앙 2세의 유일한 적자였던 아폰수 왕자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주앙 2세에게는 사생아인 코임브라 공작 조르제 데 렌카스트르가 있었지만, 그를 적자로 인정하려는 시도는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마누엘의 다른 형들도 이미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마누엘의 누나이자 주앙 2세의 왕비였던 레오노르의 노력과 귀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마누엘은 1493년 왕위 계승자(포르투갈 공작)로 지명되었다.[1] 마누엘은 1495년 주앙 2세의 뒤를 이어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3. 통치

1495년 10월, 선왕 주앙 2세의 사망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당시 포르투갈은 1494년 스페인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해외 영토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한 상태였으며, 이는 마누엘 1세가 선왕의 신항로 개척 사업을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17]

마누엘 1세의 통치는 절대 왕정의 성격이 강했다.[6] 왕국의 의회인 포르투갈 코르테스는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단 네 차례만 소집되었고, 모두 국왕이 머무는 리스본에서 열렸다.[6] 그는 즉위 초 선왕에게 재산을 몰수당했던 브라간사 가문 등 일부 귀족을 회유하면서도 중앙 집권화 정책은 계승하였다. 사법 체계와 조세 제도를 정비하고, 아폰수 5세 시대의 법전을 대체하는 『마누엘 법전』을 1521년 공포하여 법률 체계를 현대화했다.[8][6]

1521년 리스본에서 사망하였고, 자신이 건설한 제르니무스 수도원 부속 산타 마리아 교회에 안장되었다.

3. 1. 내치

1495년 10월, 주앙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마누엘 1세는 선왕의 통치 기간 동안 재산과 권한을 빼앗겼던 귀족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펼쳤다. 대표적으로 자신의 누나 이자벨의 아들인 브라간사 공작 자이메 1세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돌려주었다.[7][9] 그러나 중앙 집권화와 아시아와의 해상 무역로 개척이라는 기본 정책 방향은 선왕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마누엘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의 절대 권력이 강화되었다.[6] 왕국의 의회인 포르투갈 코르테스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단 네 번만 소집되었으며, 모두 국왕이 머무는 리스본에서 열렸다.[6]

내정에서는 사법부와 왕실의 자치 헌장을 개혁하여 조세, 공물, 권리 등의 개념을 현대화했다.[8] 또한, 각 지역마다 달랐던 도량형을 통일하려 했으나 이는 불완전한 결과로 끝났다. 귀족 영지와 자치 공동체를 포함한 모든 지방의 행정 및 재판은 국왕의 대리인인 코레제도르(Corregedor|코레제도르pt)의 감독 아래 두었다. 이러한 법규 개정 사항들을 종합하여 아폰수 5세 시대의 『아폰수 법전』을 대체하는 『마누엘 법전』을 1521년에 공포했다.[8][6]

마누엘 1세는 즉위한 해(1495년)에 그리스도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고, 주로 해외에 있던 기사단 영지를 왕령에 병합하여 왕실 재산을 늘렸다. 기사단장 칭호는 1516년 레오 10세 교황에게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마누엘 1세는 1513년 레오 10세의 즉위를 축하하며 사절을 보내 교황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때 교황에게 보낸 선물에는 해외 무역을 통해 얻은 중국 도자기, 진주, 보석과 더불어 코끼리(안노네라는 이름이 붙여짐), 표범, 페르시아 말 등 이국적인 동물들이 포함되었다.

1521년, 마누엘 1세는 리스본에서 사망했으며, 자신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건설한 제르니무스 수도원 부속 산타 마리아 교회에 안장되었다.

3. 2. 해양 개척 사업

주앙 2세 시대인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희망봉을 발견하면서 인도와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새로운 항로 개척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왕세자 아폰수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과의 영토 분쟁이 발생하면서 탐험 사업은 잠시 지연되었다. 양국 간의 분쟁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로 해결되었으나,[17] 이듬해 주앙 2세가 사망하면서 신항로 개척 사업은 다시 정체되었다.

새로 즉위한 마누엘 1세는 선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신항로 개척과 해외 무역 발전에 큰 관심을 보이며 중단되었던 사업을 적극적으로 재추진했다. 그의 지원 아래 포르투갈 탐험대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1498년): 마누엘 1세의 명령으로 1497년 출발한 바스쿠 다 가마는 이듬해 인도의 캘리컷(현재의 코지코드)에 도착하여 유럽에서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는 해상 항로를 최초로 개척했다.[12] 이 항해는 포르투갈이 향후 해상 무역을 통해 번영하는 토대를 마련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참조)
  •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 (1500년): 1500년, 인도로 향하던 카브랄 함대는 우연히 브라질 해안에 도착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이 땅은 포르투갈 영토로 선포되었고,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대륙에도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 참조)


마누엘 1세는 인도양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기존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1505년 프란시스쿠 데 알메이다를 초대 인도 총독으로 임명하여 포르투갈 세력 확장의 기반을 다졌다. 포르투갈의 인도양 진출은 기존의 무역 강자였던 이집트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의 반발을 샀으나, 포르투갈 함대는 1509년 디우 해전에서 이들 연합 함대를 격파하며 해상에서의 우위를 확보했다.

같은 해 제2대 총독으로 임명된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더욱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펼쳤다. 그는 1510년 고아를 점령하여 포르투갈령 인도의 수도로 삼았고,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인 말라카를, 1515년에는 페르시아만의 전략적 요충지인 호르무즈를 점령했다. 이로써 인도양의 주요 교역 거점들이 포르투갈의 통제하에 들어왔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 무역로를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도양 상권 개척 참조)

아프리카에서는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교역 거점을 확보하는 한편, 내륙의 왕국들과는 비교적 동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콩고 왕국의 아폰수 1세와 마누엘 1세가 주고받은 서신은 당시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대서양마데이라 제도에서는 설탕 생산을 왕실 직영으로 전환하여 생산량을 크게 늘리고 유럽 각지로 수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처럼 마누엘 1세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주도하며 아시아의 향신료, 아프리카의 금, 대서양의 설탕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16세기 해양 제국으로서의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3. 2. 1.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포르투갈이 개척한 인도 항로


바스쿠 다 가마


주앙 2세 시대인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희망봉을 발견하면서 인도와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새로운 항로 개척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1491년 아폰수 왕세자의 사망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과의 영토 분쟁이 발생하면서 항로 개척 사업은 지연되었다. 양국 간의 갈등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로 일단락되었으나,[17] 이듬해 주앙 2세가 사망하면서 사업은 다시 정체되었다. 새로 즉위한 마누엘 1세는 신항로 개척과 해외 무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다시 추진했다.

마누엘 1세의 명령에 따라, 바스쿠 다 가마는 1497년 7월 8일 170명의 선원을 태운 4척의 배를 이끌고 리스본을 출발했다. 목표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조언에 따라 시에라리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으로 크게 우회하는 항로를 택하여 아프리카 해안의 맞바람과 무풍지대를 피했다.[18][19] 항해 97일 만인 11월 초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북상했으며, 말린디에서 아랍인 항해사 이븐 마지드의 도움을 받아[20][21] 1498년 5월 20일 마침내 인도의 캘리컷(현재의 코지코드)에 도착했다.[22]

그러나 당시 인도양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무슬림 상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무역 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필요한 물품만 구입한 채 8월 말 귀국길에 올랐다.[23] 돌아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계절풍의 영향으로 항해가 길어졌고 괴혈병이 발생하여 많은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배 2척을 포기하고 생존한 55명의 선원과 함께 1499년 9월 9일 리스본으로 돌아왔다.[24][25] 비록 희생이 컸고 공식적인 무역 협정 체결에는 실패했지만, 유럽인 최초로[26] 인도 항로를 개척한 이 역사적인 항해는 포르투갈이 16세기에 해상 무역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항해에 투자했던 이들은 투자 원금의 60배에 달하는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27]

1500년경 인도 말라바르 해안 도시들


마누엘 1세는 이후에도 인도 항로 개척과 무역 확대를 위한 원정대를 계속 파견했다. 주앙 다 노바가 이끈 3차 원정대(1501년 3월 출발)는 칸나노르에 교역소를 설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캘리컷 해군과 최초의 해전을 치렀으며,[37][38] 세인트헬레나 섬을 발견하기도 했다.[39]

1502년 2월, 바스쿠 다 가마는 마누엘 1세의 명을 받아 20척의 중무장 함대를 이끌고 두 번째 인도 항해에 나섰다.[40] 이는 이전 카브랄 원정대가 캘리컷에서 공격받아 포르투갈인이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과 함께, 무력을 통해서라도 인도 지역 세력들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기 위함이었다. 다 가마는 인도양 도착 후 보복 차원에서 아랍 상선과 이슬람 순례선을 공격하고 약탈했으며,[41][42][43][44] 캘리컷 인근 해전에서 아랍-힌두 연합 함대를 격파했다. 이후 코친, 칸나노르 등에 교역소를 설치하고 5척의 함대를 인도양에 남겨둔 채 1503년 9월 리스본으로 귀환했다. 마누엘 1세는 다 가마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인도 정책 고문으로 임명했다. 이 항해를 통해 희망봉을 경유하는 유럽-인도 간 해상 무역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포르투갈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45]가 이끈 5차 원정대는 1503년 4월에 출발하여 캘리컷의 침공으로 위험에 처한 코친을 구원하고 그곳에 요새를 건설했다.[46] 퀼론에도 교역소를 설치했으나, 항해 중 배 4척을 잃고 많은 선원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1504년 9월에 귀국했다.[47][48]

이후 마누엘 1세는 1505년 프란시스쿠 데 알메이다를 초대 인도 총독으로 임명하여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포르투갈은 1509년 디우 해전에서 이집트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연합 함대를 격파하며 인도양 제해권 확보에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같은 해 제2대 총독으로 임명된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1510년 고아를 점령하여 인도 지배의 거점으로 삼고, 1511년에는 말라카를 점령하여 동남아시아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인도양과 페르시아 만의 해상 교역로는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3. 2. 2.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

보라색 실선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한 경계선이다.


주앙 2세 사후 새로 즉위한 마누엘 1세는 신항로 개척 및 해외 무역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중단되었던 탐험 사업을 적극적으로 재추진했다.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1468년~1520년)이 이끄는 13척의 함대가 1500년 3월 9일, 마누엘 1세의 명을 받고 리스본을 출발했다.[28] 함대의 주요 목적은 인도의 캘리컷(현재의 코지코드)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다.[29]

인도를 향해 남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카브랄 함대는 적도 부근의 해류와 무역풍에 예상보다 서쪽으로 더 밀려나게 되었다. 1500년 4월 22일, 함대는 육지를 발견했는데, 이곳이 바로 브라질이었다.[30][31] 카브랄은 발견한 곳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거하여 포르투갈 영토임을 선포했다. 당시 1494년에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는 대서양의 특정 경선을 기준으로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탐험 및 영유권을 갖기로 했는데, 브라질은 이 경계선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카브랄 함대는 브라질 해안에 약 열흘간 머물며 탐사를 진행했다.

브라질을 떠나 인도를 향한 항해를 재개했지만, 희망봉을 도는 과정에서 격렬한 폭풍우를 만나 함선 6척을 잃는 큰 손실을 입었다.[32] 남은 함선들은 1500년 9월 13일, 목적지인 캘리컷에 도착했다. 카브랄은 캘리컷의 통치자와 만나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포르투갈 교역소(상관)를 설치했다. 이후 향신료 등 상품 구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인도양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아랍 상인들은 새로운 경쟁자인 포르투갈의 등장을 경계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포르투갈의 교역 활동을 방해했다.[33] 카브랄은 캘리컷 당국에 아랍 상인들의 방해를 막고 포르투갈에게 향신료 시장에서 우선권을 줄 것을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 이에 분노한 카브랄은 보복 조치로 아랍 상선을 나포하고 약탈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한 아랍인들이 1500년 12월 17일 포르투갈 교역소를 습격하여 포르투갈인 54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4] 당시 카브랄의 함선들은 외항에 정박해 있어 교역소를 방어할 수 없었다.

교역소 습격에서 간신히 탈출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카브랄은 이 사건의 배후에 캘리컷의 통치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보복으로 인도 선박 여러 척을 나포하여 선원들을 살해하고, 캘리컷 항구 일대에 무차별적인 함포 사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34][35] 이후 카브랄 함대는 캘리컷에서 철수했다. 이 사건은 포르투갈과 캘리컷 사이에 지속적인 갈등 관계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브랄은 캘리컷과 경쟁 관계에 있던 남쪽의 칸나노르와 코친으로 이동했다. 이들 지역에서는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향신료 등을 성공적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임무를 마친 카브랄 함대는 1501년 1월 16일 귀국길에 올랐다.[29] 돌아오는 항해 중에도 배 2척을 추가로 잃었지만, 최종적으로 5척의 배가 1501년 6월 23일 리스본에 도착했다.

총 13척 중 8척의 배를 잃고 많은 인명 피해를 겪었지만, 가져온 향신료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이 항해를 통해 포르투갈은 브라질이라는 거대한 땅을 발견하여 아메리카 대륙에도 식민지 개척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인도 현지 세력과 공식적인 교역 관계를 수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3. 2. 3. 인도양 상권 개척



1495년 선왕 주앙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마누엘 1세는 신항로 개척과 해외 무역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관련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주앙 2세 말년에 왕세자 사망과 스페인과의 영토 분쟁 등으로 지연되었던 탐험 사업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로 분쟁이 해결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17]

마누엘 1세의 명령에 따라 1497년 7월 리스본을 출발한 바스쿠 다 가마1498년 5월 인도[12]의 캘리컷(코지코드)에 도착하여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는 해상 항로를 개척했다. 1500년에는 마누엘 1세의 명으로 인도 원정에 나선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항해 중 브라질에 표착했으며, 이후 동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도착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위치에 있던 브라질은 조약 규정에 따라 포르투갈 영토가 되었다. 또한 1501년에는 가스파르와 미겔 형제가 북아메리카의 래브라도를 발견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은 인도양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기존에 교역을 주도하던 아랍인 이슬람 상인들을 몰아내 교역로를 독점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1505년 프란시스쿠 데 알메이다를 초대 인도 총독으로 임명했다.

초기 원정 과정에서 포르투갈은 현지 세력과 충돌하기도 했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45]가 이끈 5차 원정대(1503년 4월 출발)는 8월 인도에 도착하여 캘리컷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코친을 구원하고 그곳에 요새[46]를 건설했으며, 퀼론에 교역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항해 중 4척의 배를 잃고 귀국길에는 적도 무풍지대에서 64일간 표류하며 130명의 선원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1504년 9월 단 2척만이 리스본으로 귀환했다.[47][48]

로포 소아레스가 이끈 6차 원정대(1504년 4월 출발)는 13척의 중무장 전함과 1,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캘리컷을 제압하고 인도 현지 수비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졌다.[49] 8월 인도 도착 당시 코친을 공격하던 캘리컷 군대는 이미 철수한 상태였다. 이후 포르투갈은 크랭가노레(10월)[50]와 판다레인(12월)[51]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로 인해 캘리컷의 속국들이 이탈하여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는 등 캘리컷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6차 원정대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1505년 7월 귀환하여 국왕의 큰 환영을 받았다.

포르투갈의 인도양 진출은 기존의 강자였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그리고 이들과 교역하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반발을 샀다. 이들은 동맹을 맺고 포르투갈에 대항했으나, 1509년 포르투갈 함대는 디우 해전에서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며 해상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제2대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더욱 공세적인 정책을 펼쳐 1510년 고아를 점령하고 이곳을 포르투갈령 인도의 수도로 삼았다. 이어 1511년에는 말라카를 점령하여 동남아시아 무역의 중심 거점으로 삼고, 주변 섬에서 생산되는 향신료 등을 고아로 집결시키는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1515년에는 호르무즈를 점령하여 페르시아 만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1517년에는 중국 광둥성에 도달하기도 했다. 알메이다와 알부케르크 두 총독 시대를 거치며 포르투갈은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의 해상 루트를 거의 독점하게 되었고, 아시아와 포르투갈을 직접 잇는 해상 교역로를 완성했다.

아프리카에서는 해안을 따라 교역 거점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으며, 내륙 왕국들과는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콩고 왕국의 아폰수 1세와 마누엘 1세 사이에 오간 서신은 당시 양국의 관계뿐 아니라 콩고 왕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대서양에서는 마데이라 제도에서의 설탕 생산을 왕실 직영 사업으로 전환하여 생산량을 크게 늘리고 유럽 각지에 수출했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향신료, 아프리카의 금, 마데이라의 설탕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3. 3. 군주 자본주의

1495년 10월, 주앙 2세가 붕어하자 마누엘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그는 선왕 치세 동안 재산과 권한을 빼앗겼던 브라간사 가문의 자이메 1세(마누엘의 누나 이자벨의 아들)를 비롯한 귀족들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돌려주며 회유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중앙 집권화 강화와 아시아와의 해상 무역로 개척이라는 기본 정책 노선은 선왕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마누엘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의 절대 권력이 통치의 기본 방식이었다. 포르투갈 코르테스(왕국의 의회)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단 네 번만 소집되었으며, 항상 국왕의 소재지인 리스본에서 열렸다. 이는 절대 왕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내정에서는 각 지역마다 달랐던 조세 제도와 도량형을 근대화하고 통일하려 시도했으며, 귀족 영지와 자치 공동체를 포함한 모든 지방의 행정과 재판을 국왕의 대리인인 코레제도르(Corregedorpt)의 감독 아래 두었다. 그는 사법부와 왕실의 자치 헌장을 개혁하여 세금, 공물, 권리의 개념을 현대화했다. 이러한 법규 개정 사항들을 종합하여 아폰수 5세 시대의 『아폰수 법전』을 대체하는 마누엘 법전을 1521년에 공포했다. 다만, 도량형 통일 시도는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또한, 마누엘 1세는 즉위한 해에 그리스도 기사단장이 되었고, 주로 해외에 있던 기사단 영지를 왕령에 병합하여 왕실 재산을 크게 늘렸다. 기사단장 칭호는 1516년 레오 10세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레오 10세가 즉위한 1513년에 축하 사절을 파견하여 교황청과의 관계를 강화했으며, 이때 해외 무역으로 얻은 중국 도자기, 진주, 보석과 코끼리(안노네), 표범, 페르시아 말 등 진귀한 동물들을 선물로 보냈다.

초기 포르투갈의 해외 무역은 국왕 소유의 선박으로 국왕의 상품을 거래하고, 그 이익 역시 국왕에게 귀속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상인과 선원들은 임금을 받는 고용인 신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원칙 아래에서도 개인의 화물 거래가 허용되었으므로, 국가 주도 무역과 민간 교역이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6세기 중반부터 점차 왕실 주도에서 귀족 주도로 사업의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인도양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또 다른 중요한 방법은 통행료 징수였다. 포르투갈은 강력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주요 해상 길목을 장악하고, 항로를 지나는 선박들에게 안전통행증(카르타즈, Cartazpt)을 발급하며 통행료를 받았다. 이 안전 통행증 제도는 1502년에 처음 시작되어 점차 확대되었다.[64] 인도양에서 활동하던 상인들이 카르타즈를 구매한 것은 포르투갈의 군사력에 굴복한 측면도 있지만, 경제적인 실익이 더 컸기 때문이다. 통행증을 소지한 선박은 포르투갈 항구에서 통상 관세율인 6%보다 낮은 3.5%의 관세를 적용받았으며, 상선이 직접 무장하는 비용보다 통행증 구매 비용이 더 저렴했다. 또한, 1434년 명나라의 '무역 금지령' 이후 사무역에 종사하던 많은 중국 상인들은 카르타즈를 구입함으로써 자신들의 선박이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게 되어 금지령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65]

3. 4. 유대인 정책

포르투갈의 역대 선왕들은 금융과 상업 발전에 기여하는 유대인을 포용하는 관용 정책을 펼쳐왔다.[13] 선왕 주앙 2세 시기 스페인에서 추방되어 포르투갈로 피난 온 유대인 중 체류 기한을 넘긴 이들은 노예 신분이 되었으나, 마누엘 1세는 즉위 직후 이들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마누엘 1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려는 정략적 목적으로[66] 가톨릭 군주의 딸인 이사벨 공주와 결혼을 추진하면서 스페인 측의 압력에 굴복했다. 1496년 12월, 스페인의 요구대로 기독교 세례를 거부하는 유대인은 포르투갈을 떠나야 한다는 추방령을 내렸다.[66]

마누엘 1세는 상업, 금융, 전문직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유대인을 잃는 것이 국가 경제에 큰 손실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에 추방 기한이 되기 전에 왕의 칙령으로 포르투갈 내 모든 유대인을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1497년 3월 19일부로 이들은 형식적으로 기독교도가 되었으며, '새 기독교인'(마라노)으로 불리며[4] 사회적 차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포르투갈 사회 내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또한 마누엘 1세는 포르투갈 내 무슬림에게도 추방령을 내렸으며, 스페인의 페르난도와 이사벨에게 스페인 내 이슬람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3. 4. 1. 리스본 대학살 (1506년)

스페인카스티야에서 1492년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지자 최소 10만 명[13] 이상의 유대인이 포르투갈로 피난했다. 선왕 주앙 2세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8개월 체류만 허용했으며, 기한을 넘긴 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마누엘 1세는 즉위 직후 이들 유대인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부부왕의 딸이자 아폰수 왕세자의 미망인이었던 이사벨과 결혼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스페인 측은 결혼 조건으로 포르투갈 내 유대인 추방을 요구했고, 마누엘 1세는 1496년 이를 수용하여 포르투갈에서도 기독교 외 종교 의식을 금지하고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토마르 시나고그 참고).

마누엘 1세는 상업, 금융, 전문직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유대인을 잃는 것이 국가 경제에 큰 손실임을 알았기에, 이들을 붙잡아두려 형식적인 강제 개종을 시행했다. 1497년 3월 19일을 기해 포르투갈 내 모든 유대인은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간주하고, 실제 신앙 조사는 20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이 유예 기간은 마누엘 1세 치세 동안 계속 연장되어 실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표면상 기독교도가 된 유대인들은 '새 기독교도'(마라노)로 불리며 여러 면에서 차별을 받았다. 특히 14세 미만 자녀는 부모와 떨어져 기독교 가정에서 양육되도록 강제되었다.

왕이 종교적 관용을 버리자 사회 분위기도 경직되었다. 관용이 사라진 사회에는 침체와 분열이 심화되었다.[67] 형식적으로만 개종하고 유대인 정체성을 유지하던 이들 중 다수는 자산가나 채권자였기에 증오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왕의 보호라는 방패막이 사라지자 억눌렸던 증오가 극단적인 폭력으로 분출되었다. 결국 1506년 4월 19일 리스본에서는 유대인 대학살의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68] 이 사건으로 7,0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마누엘 1세는 이에 크게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4. 마누엘 양식

벨렝 탑. 마누엘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이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해양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이는 마누엘 1세 시대의 문화적 번영으로 이어졌다. 왕실의 재정은 풍족해졌으며, 마누엘 1세는 이를 바탕으로 궁전을 화려하게 단장하고 많은 건축물을 새로 지었다. 건축에 필요한 자금은 주로 아프리카와 동방 무역에서 거둔 세금의 일부를 통해 마련되었다.[74]

마누엘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지어진 건축물들은 특유의 풍부하고 화려한 장식 양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후대에 '마누엘 양식'(estilo manuelino|에스틸루 마누엘리누pt)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양식은 당시 포르투갈이 누렸던 해상 무역의 황금기를 반영하듯, 부표, 돛, 조개, 산호, 밧줄 등 바다와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을 건축 장식 모티프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69][70] 또한,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해외에서 들여온 이국적인 동식물 문양 등도 장식에 사용되었다.

마누엘 양식은 포르투갈 고유의 건축 양식으로 발전했으며,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리스본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 탑, 토마르의 그리스도교 수도원, 그리고 바탈야 수도원 등이 있다. 이 건축물들은 오늘날 포르투갈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4. 1. 대표적인 건축물



16세기 초 해양 무역은 포르투갈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이는 마누엘 1세의 궁전을 화려하게 만들고 많은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 기반이 되었다. 건축 자금은 주로 아프리카와 동방 무역에서 거둔 세금의 일부로 충당되었다.[74] 마누엘 1세 재위 기간에 지어진 건축물들은 풍부하고 화려한 장식이 특징인데, 이는 이후 마누엘 양식으로 불리게 되었다. 해상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대상을 반영하듯, 마누엘 양식은 부표, 돛, 조개, 산호, 로프 등 바다와 관련된 요소들을 장식에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69][70] 해외 무역으로 부유해진 마누엘 1세는 궁정에 예술가와 과학자를 많이 초청하여 후원자로서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마누엘 1세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벨렝 탑, 바탈야 수도원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198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마누엘 1세의 명령으로 1512년에 착공하여 1519년에 완공된 벨렝 탑은[71] 리스본 벨렝 지역의 타구(Tagus) 강 하구에 위치하며, 총 4층으로 높이는 30m에 달한다. 이 탑은 스페인 출신의 수호성인 성 빈센트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71] 처음에는 카스카이스 요새와 강 건너편의 세바스티앙 다 카파리카 요새를 잇는 방어 요새로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 선박의 출입 감시, 통관 수속, 심지어 감옥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탑의 장식은 전형적인 마누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리스본에 위치한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마누엘 1세가 그의 선조인 엔히크 항해왕자(1394~1460)를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다.[72] 150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73] 1672년에 완공되었다.[74] 이 수도원은 원래 엔히크 항해왕자의 명으로 지어졌던 산타 마리아 예배당 자리에 세워졌는데,[75] 바스코 다 가마와 그의 선원들이 1497년 인도로 원정을 떠나기 전날 밤, 바로 이 산타 마리아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6][77] 석회암으로 지어진 이 수도원은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수도원 내 산타 마리아 성당의 정면(파사드) 중앙에는 마누엘 1세와 그의 왕비 마리아, 성 제로니무스, 세례자 요한 등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남쪽 문과 이어진 회랑에는 후기 고딕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성인과 고승들의 조각상 24개가 세워져 있다.[72] 수도원 내부에는 마누엘 1세와 바스코 다 가마 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72]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당시에도 난간(발루스트레이드) 등 일부만 파손되었을 뿐,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78]

바탈야 수도원(Batalha monastery)


바탈야 수도원은 주앙 1세(1357~1433)가 카스티야후안 1세의 침공을 물리친 알주바로타 전투(1385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388년에 짓기 시작한 건축물이다.[79] 수도원은 레이리아(Leiria) 시의 남쪽에 위치하며, 전투가 벌어졌던 알주바로타 평원은 수도원에서 남서쪽으로 14km 떨어져 있다.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은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지만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수도원의 정면(파사드)은 포르투갈 후기 고딕 양식을 보여주며, 성당 자체도 같은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작은 탑, 아치, 부벽(버트레스)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성당 내부는 높이 32.5m, 길이 79m이며, 성당 문 모퉁이에 있는 6개의 기둥에는 천사, 교황, 성인, 왕 등 많은 인물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80] 수도원 내부에는 주앙 1세와 그의 왕비 필리퍼,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엔히크 항해왕자의 묘가 있다. 그 외에도 왕실 묘소에는 다른 왕들의 묘도 안치되어있다. 비록 마누엘 1세 시대에 직접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포르투갈 역사와 건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마누엘 양식과 함께 거론되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이다.

5. 가계



마누엘은 1469년 5월 31일 알코체테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비제우 공작 페르난두이며, 어머니는 비제우의 베아트리스이다. 아버지 페르난두는 국왕 두아르테 1세의 셋째 아들이자 아폰수 5세의 동생이었고, 어머니 베아트리스는 두아르테 1세의 동생인 주앙의 딸로, 부모는 사촌 관계였다. 마누엘은 이들 사이의 아홉 자녀 중 막내였다.[15] 어머니 베아트리스의 언니 이사벨은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결혼하여 이사벨 1세를 낳았으므로, 마누엘은 이사벨 1세 여왕과 사촌 관계였다.

마누엘의 누나 레오노르는 1473년 사촌인 왕태자 주앙 2세와 결혼하여 1481년 왕비가 되었다. 이로써 마누엘은 국왕 주앙 2세의 사촌이자 처남이 되었다. 주앙 2세는 왕권 강화를 추진하며 귀족들과 대립했는데, 이 과정에서 마누엘의 형이자 비제우 공작이었던 디오고가 1484년 국왕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주앙 2세에게 직접 살해당했다.[15] 형이 반역죄로 죽었음에도 마누엘은 누나인 레오노르 왕비의 간청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1491년 주앙 2세의 유일한 적자였던 아폰수 왕세자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주앙 2세는 자신의 사생아인 조르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왕비 레오노르와 귀족들의 반대, 그리고 사후 정통성 문제로 인한 내전 우려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 마누엘의 다른 형들도 모두 사망한 상태였기에, 1493년 주앙 2세는 마누엘을 왕위 계승자로 공식 지명했다.[1] 1495년 주앙 2세가 사망하자 마누엘이 국왕으로 즉위했다.

마누엘 1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스페인가톨릭 군주인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맏딸인 이사벨 데 아라곤 이 카스티야(1470~1498)이다. 그녀는 본래 마누엘의 전임자인 주앙 2세의 아들 아폰수 왕세자와 결혼했으나 1491년 사별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1497년 마누엘과 재혼했다. 이사벨은 아들 미겔을 낳은 후 며칠 만에 사망했다.


  • 아들: 미겔(1498~1500) - 포르투갈, 카스티야,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였으나 요절.


두 번째 부인은 첫 부인의 동생이자 가톨릭 군주의 셋째 딸인 마리아 데 아라곤 이 카스티야(1482~1517)이다. 1501년에 결혼하여 마누엘의 후계자인 주앙 3세를 포함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주앙 3세1502년1557년포르투갈 국왕
이사벨1503년1539년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황후, 스페인펠리페 2세의 생모
베아트리스1504년1538년카를로 3세 디 사보이아와 결혼
루이스1506년1555년베자 공작, 안토니우 (크라투수도원장)의 아버지
페르난두1507년1534년구아르다 공작
아폰수1509년1540년추기경
마리아1511년1513년요절
엔히크 1세1512년1580년추기경, 포르투갈 국왕
두아르테1515년1540년기마랑이스 공작, 주앙 4세의 증조부
안토니우1516년1516년요절



세 번째 부인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펠리페 1세와 후아나 여왕의 맏딸인 레오노르(1498~1558)이다. 그녀는 마누엘의 전 부인들의 조카이자 카를 5세 황제의 누나였다. 1518년에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레오노르는 마누엘 사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재혼했다.


  • 아들: 카를루스(1520~1521) - 요절
  • 딸: 마리아(1521~1577) - 비제우 여공작, 포르투갈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한 명이었으나 미혼으로 사망.

6. 사망

1521년 12월, 흑사병에 걸리자 리베이라궁 안에 격리되었다. 12월 4일부터 심한 열이 발생하였고 12월 13일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죽은 다음 날인 12월 14일, 그의 시신은 검은 벨벳으로 덮인 관에 담긴 후 리스본의 벨렘 지구로 이송되었고, 추모객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는 레스텔로 교회에 임시로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1551년에 두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마리아와 함께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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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설 500th Anniversary of the Forced Conversion of the Jews of Portugal 199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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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문서 동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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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적 1997
[43] 서적 삐딱하고 재미있는 세계탐험 이야기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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